
이번 여행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의 여행이란은 것, 쇼샤 부인이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는 것,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녀가 언젠가 돌아올 예정이거나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한스 카스토르프는 직접 그녀의 입으로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이러한 다짐은 우리에게 전달된 프랑스어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 이어서 우리가 볼 때 대화가 없었던 막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시간과 결부된 우리 이야기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그 시간을 오로지 순수한 시간으로만 흘러가게 했다. 어쨌거나 한스 카스토르프 청년은 34호실로 돌아가기 전에 이러한 다짐과 위로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15)
"침묵하는군요." 세템브리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당신네 나라는 유보적인 침묵을 계속하고 있어, 침묵의 불투명함 때문에 도저히 그 깊이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 건지, 말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건지, 무뚝뚝하다 할 정도로 말을 신성화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말로 표현하는 세계는 당신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습니다.이보시오, 이건 위험한 일입니다. 말이야말로 문명 그 자체입니다. 말은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서로를 결합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무언은 고독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행동으로 고독을 깨뜨리려 한다고 추측합니다. 자코모(세템브리니는 요아힘을 부르기 쉽게 '자코모'라고 부르곤 했다), 당신 사촌인 자코모를 앞에 세워 놓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칼을 마구 휘둘러 우리 둘을 해치워 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도망갈' 것입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웃기 시작하자 세템브리니도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의 조형적인 효과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335)
우리는 시간을, 순전히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간이 지나갔고, 시간이 경과했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결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계속 울려 대고는 이를 음악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채우고, 시간을 '품위 있게 메우며', 시간을 '잘게 나누고', 시간에 '내용을 부여하며', 언제나 '무언가를 싲가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인이 된 요아힘이 어떤 기회에 입 밖에 낸 말, 망자가 된 사람의 말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슬프고도 경건한 기분으로 인용해 본 것이다. 아득히 오래전에 잊힌 이 말이,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는가를 독자가 과연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삶의 기본 요소이듯이, 시간은 이야기의 기본 요소이다. 시간이 공간 내의 물체와 결부되어 있듯이, 시간은 이야기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은 시간을 재고 나누며, 시간을 짧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값지게도 하는 음악의 기본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방금 말했듯이 음악은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야기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 예술 작품처럼 단번에 눈에 들어오며, 물체로서만 시간에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연속적으로만, 시간이 경과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379-380)
"... 삶은, 이보시오, 여성입니다. 그것은 탐스럽게 봉긋 솟아 있는 유방, 툭 튀어나온 엉덩이 사이의 펑퍼짐하고 부드러운 배, 날씬한 팔과 부풀어 오른 허벅지, 반쯤 눈을 감고 살며시 누워있는 여성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 우리 남성적 욕망의 모든 활력이 자신의 눈앞에서 합격하든가, 또는 패배하는가의 여부를 손아귀에 쥐고 보기 좋게 비웃으며 도발적으로 이를 요구하는 여성입니다. 패배한다는 게, 이보시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삶에 대한 감정의 패배, 그것은 불충분함입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은총도 동정도 자비도 없으며, 그것은 가차없이 코웃음을 받으며 내팽겨쳐질 뿐입니다. 끝장나고, 이보시오, 침이 뱉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파멸과 파산, 이러한 견디기 힘든 치욕에는 수치나 불명예라는 말로는 턱도 없이 불충분합니다. 그것은 종말이자 지옥 같은 절망이며 세상의 멸망입니다." (429)
전에 말했듯이, 페퍼코른이라는 인물 때문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한스 카스토르프의 친구이자 스승은 논쟁을 벌일 때가 그래도 가장 살판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곧장 이들은 물 만난 물고기와 같은 반면 페퍼코른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튼 이때 그가 하는 역할은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기지와 말과 정신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고 사실과 지상의 실제적인 일, 요컨대 지배자적인 속성이 힘을 발휘하는 문제와 사실이 문제의 관건이 될 때는 의심의 여지 없이 상황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 그들은 뒷전에 밀려나고 그늘 속으로 들어가 초라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페퍼코른의 독무대가 되어, 그가 규정하고 결정하며, 지시하고 주문하고 명령하게 되었다. 그가 이런 상태를 초래하기 위해 이론적 분위기를 현실적 분위기로 바꾸려 한 게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이론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거나, 또는 그것이 길어지는 한에는 그는 고통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가 허영심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서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그 점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스케일이 큰 인물에게는 허영심이란 없으며, 위대함은 허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페퍼코른이 실제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이유 떄문이었다. 대강 말하면 그것은 '불안' 이었다. 한스 카스토르프가 세템브리니에게 시험 삼아 설명하면서 어느 정도 군인적인 성향이라고 말하려 한 열성적인 의무감과 명예심 때문이었다. (480)
아주 경건한 사랑에서부터 지극히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해 언어가 하나의 단어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위대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그것은 애매모호함 속의 완전한 분명함이다. 사랑이란 아무리 경건한 사랑이라 해도 비육체적일 수 없으며, 아무리 육체적인 사랑이라 해도 불경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교활한 친근성으로 나타나든, 최고의 열정으로 나타나든 간에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유기적인 것에 대한 공감이며 부패할 운명을 지닌 육체를 감동적일 정도로 관능적으로 껴안는 것이다.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열정이나 미쳐 날뛰는 열정에도 그 속에는 기독교적인 사랑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애매한 의미라고? 하지만 사랑의 의미를 제발 애매한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의미가 애매하므로 사랑에는 삶과 인간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가 애매하다고 걱정하는 것은 절망적일 정도로 교활하지 못하다는 걸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497)
잘 가게나, 한스 카스토르프, 인생의 진실한 걱정거리 녀석이여! 너의 이야기가 다 끝났어. 우리는 너의 이야기를 끝마친 셈이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연금술적인 이야기였지. 우리는 이야기 자체를 위해 너의 이야기를 한 것이지, 너를 위해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어. 너는 평범한 청년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결국 이건 너의 이야기였어. 이런 이야기가 너에게 일어난 걸 보면 보기와는 달리 네가 보통내기가 아닌 게 분명해. 그리고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너에게 교육자적인 애착을 느낀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리고 이러한 애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앞으로 너를 볼 수도 없고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손가락 끝으로 눈시울을 살짝 누르고 싶어지는구나.
잘 가게나. 네가 살아 있든 그대로 사라지든 간에 말이야! 너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을 거야. 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앞으로 몇 년간은 죄 많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지. 네가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놓아둘 거야. 네가 겪은 육체와 저신의 모험은 너의 단순성을 교양시켜,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 수 없겠지만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남게 했어. 너는 예감에 가득 차 '술래잡기'에 의해 죽음과 육체의 방정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어. 온 세상을 뒤덮는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는 열병과도 같은 사악한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이 샘솟는 날이 올 것인가? (726-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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