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소설

[사신치바] 이사카 코타로. 웅진지식하우스.

리노타호 2025. 9. 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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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죽음에는 특별한 의미나 가치도 없다. 요컨대 거꾸로 생각하자면 누구의 죽음이나 같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언제 죽느냐에는 흥미가 없다. 하지만 글머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걸음을 한다. 왜냐? 일이기 때문이다. 이발소 주인의 말마따나. (14)

 

"하지만 이런 큰 눈은 처음이야. 평소에는 기껏해야 빈데." 나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집요하게 그리고 강경하게 연이어 쏟아지는 흰 눈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좋다. 풍경이란 한 가지 색이 되어야 하는 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인간 세계는 너무 많은 색으로 넘쳐난다. "자네가 저 마유코라는 여자를 담당하고 있었나?" (138)

 

"나는 생각이 나면 곧장 말해버리지. 인생이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니 대화는 나눌 수 있을 때 나누어야 해. 무례하든가 말든가. 그렇게 생각하지?" 요전 날 만난 인간이 잘난 척하며 늘어놓았던 사설을 나도 흉내 내어본다. 그러고는 "인생은 짧으니까"하고 말한다. 자네의 경우는 앞으로 일주일이다, 하고 무심코 말하고 싶어진다. (170)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은 음악이고, 가장 추한 것은 정체야. 그에 비하자면 짝사랑 같은 건 대수로운 게 아니야. 그렇지?" (175)

 

"환갑이 지난 숙부였는데 말이죠. 운영하던 회사는 망했지, 손자는 소년원에 들어갔지, 엎친 데 덮친다고 부인은 차 사고를 일으키고. 그래서 말이죠. 전에 여기서 머리를 자를 때, "이렇게 불행한 인생, 참 싫다"고 말을 했죠. 그에 비하면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서 아들 둘을 의사로 키운 다른 숙부 쪽이 행복하다고 말이죠. 그랬더니 니타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글쎄요"

"'그 사람들이 죽었나?' 하고 말했어요."

듣고 있던 노파가 가위를 움직이면서 작게 웃었다.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죽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살아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니까." 노파가 절실하게, 하지만 엄숙하지는 않게 말했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어. 관 두껑이 덮이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모르니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말아요." 다케코가 개를 쓰다듬는다. "실제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숙부도 지금은 부인이 신흥종교에 미쳐서 밎을 지고 있는 모양이고, 무적의 정치가가 늙자 증인으로 소환당하기도 하고, 유명한 스포츠 선수가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죽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이런 건가." 나는 그때 무언가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아주 오래전에 담당했던 야구선수를 떠올렸다. "'야구는 9회말까지 해봐야 안다'는 말과 같은 건가?"

"아아, 비슷할지도." 노파가 유쾌한 듯 대답했다.

"비슷하지 않아요. 조금 달라요." 다케코가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셋!" 하고 소년이 의미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혼자 즐거워하고 있다. (308)

 

"그렇지만 말이죠. 옛날에 어떤 영화에서 나온 말인데, 아주 작은 미묘한 거짓말은 실수에 가깝대요"하고 이를 보이며 웃었다. "무슨 영화였더라..."

"오호."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 대사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기억을 얼마간 과거로 되돌리고 다시 한 번 노파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자, 그녀와는 옛날에도 만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혹시, 아까 그 재킷..." 하고 나는 묻고 있다. "그 낡은 재킷은 옛날에 바겐세일 때 산 건가요?"

"그랬던가. 잊어버렸어요. 옛날 일이니까" 하고 노파는 말했따.

몇 십 년인가 전에 내가 조사를 했던 남자 하나가 부티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해낸다. "계속 가지고 있었던 건가요?"

"마음에 들었으니까." 노파는 대답하면서도 줄곧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 옛날이야기를 계속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파도 소리에 튕겨 돌아와 쏴, 하고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얼마 뒤 옆으로 눈길을 주자, 노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입가를 이완시키고 있다.

"왜 웃는 거죠?"

그녀는 천천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다소 당황한 듯, "눈부시다고요, 태양이" 하고 대답했다. 듣고 보니 햇살이 오른쪽에서 쏟아지고 있다.

"그렇군요." 나는 하나 배웠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눈부실 때와 웃을 때 닮은 표정을 짓는군요."

노파는 한순간 멀거니 있었지만 곧바로 "그렇네요"라고 대답했다. "듣고 보니 속사정도 닮은 것 같기도..."

"속사정?"

"눈부신 거랑 기쁜 거랑 닮았는지도."

"무슨 소리에요, 그건?" 노파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눈이 부시네." 노파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34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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