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_지도에 없는 입지 이야기
도로의 문제가 심각하다. 도로가 감당할 수 있는 교통량은 저밀도일 때의 구도심 상태 그대로인데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인구는 서너 배로 불어난다. (19)
부동산에서 말하는 접근성은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경우 다른 한쪽엔 심각한 결핍이 존재하기도 해서다. 분양광고를 예로 들자면 막연히 서울과 가깝다는 것만 강조하는 지역들이다. 직선거리로 그었을 땐 정말 가깝다. 다만 연계할 수 있는 교통이 부족할 뿐이다. (34)
급지 역전이 일어나는 원인은 여러 가지다. 첫째는 재개발이나 재건축 같은 정비사업을 통해서다. 대표적 사례가 아현뉴타운이다. 재개발이 이뤄진 뒤 비로소 입지의 가치가 발현됐다. 원래도 위치는 좋았다. 서울의 3대 업무지구 가운데 두 곳인 광화문·시청과 여의도를 양쪽에 끼고 있다. 다만 집이 낡은 상태였을 뿐이다. 그러나 재개발사업을 통해 신축 아파트로 하나둘 도배되면서 지역에 대한 선호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도심 가까운 신축 대단지는 그만큼 귀했다. 만만찮은 구릉지에 걸쳐 있다는 단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39)
물론 단순히 집과 도로 정도 좋아졌다고 해서 통념상의 급지 순위가 확 뒤집어지진 않는다. 주거 여건이 개선되고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 마련돼서 인식적 개선까지 이뤄졌을 때 변화가 생긴다. 특히 학군과 면학 분위기가 중요하다. 다만 학군은 개선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마치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랐던 우리처럼 말이다. 설령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 아이들 세대엔 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전을 꿈꿀 수 있는 세계가 달콤하다. (44)
2장_호재라는 환상
굵직한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광역전철을 건설하기 위해선 정부가 수립하는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반영시키는 게 우선이다. 이 계획은 5년 단위로 고시된다. 반영의 쿨타임도 5년이라는 의미다. 한번 탈락하면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68)
철도 호재는 마치 금방이라도 실현될 것처럼 과장 광고가 이뤄지는 편이다. 아파트 분양광고에선 '예정'과 '계획' 천지다. 사업이 정확히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는 숨기고 청사진만 제시한다. 특히 지역 커뮤니티의 핌피가 이를 부추긴다. 하지만 실현 가능 여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계획과 타당성도, 삽을 떴느냐도 아니다. 이제 곧 개통하는지를 봐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제때 삽을 뜬 사업조차 완료 시기를 못 박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혜를 입게 될 지역의 가격이 오르기 전에 선점하겠다는 건 장외주식을 사서 주식 시장 상장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대박을 칠 수도 있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수도 있다. 자칫하면 공사로 인한 정체 등 불편만 수년 동안 감당하다가 개통 전에 지쳐 떠나는 새드 엔딩이 될 수도 있다. (75-76)
평택 부동산 시장의 상황이 안 좋다거나 전망이 어둡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신도시의 수익형 부동산 상품은 입주 초기 단계에 공실 사태를 앓는다. 적정 수요가 자리 잡기까지 겪어야 하는 신도시의 홍역이다. 고덕신도시와 주변 지역은 건설 근로자 등으로 가불해 끌어왔던 수요가 한꺼번에 증발하면서 홍역을 심하게 앓았을 뿐이다. (95)
조망을 강조하는 곳에선 일반적인 조망권인지 영구적인 조망권인지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땅은 답을 알고 있다. (105)
3장_집 분석의 맹점
다만 거주 측면에서는 거대한 하나의 단지가 아니라 각각의 단지다. 관리사무소나 입주민 편의시설도 모두 따로 운영한다. 입주자모집공고문에도 명시돼 있다. 아주 작게. (132)
그런데 물량 절반을 나눠 일단 500가구만 분양했고 똑같이 1,000명이 청약한다면 어떨까? 경쟁률은 2대1이 된다. 나중에 나머지 500가구를 분양할 때 어떤 마케팅을 할 수 있을까? '부동산 시장이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 1차 물량이 경쟁률 2대1을 기록할 정도로 선방한 아파트'가 되는 것이다. (133)
4장_정책이 바꾸는 입지
분당과 일산을 비교할 땐 서울로부터 거리가 아니라 그 도시들이 갖고 있는 자생력을 들여다봐야 한다. 자족 기능이 보충되지 않는 일산은 얼마든지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 도시라는 게 약점이다. (153)
그러나 판교가 자족용지 규모 때문에 성공한 신도시로 평가받는 건 아니다. 도시 면적 890만 제곱미터 가운데 업무시설 및 도시지원시설 용지는 48만 제곱미터에 불과하다. 비율로 치면 5% 수준이다. 3기 신도시들의 자족용지 비율이 두 자릿수를 넘는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성공의 요인이 다른 곳에 있음을 말해주는 숫자다. 판교는 특화산업을 정하고 용지 분양가를 낮추거나 세제 지원을 하는 등 기업을 유인할 당근을 여럿 준비했고, 입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광역교통망도 지속적으로 확충했다. 무엇보다 판교테크노밸리라는 이름을 브랜드화했다. IT 산업이 집약된 혁신적인 산업단지라는 이미지를 각인한 것이다. (156)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결말은 자족용지가 골칫거리 빈 땅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3기 신도시가 발표되던 시점에 수도권 주요 택지지구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새롭게 자족용지를 조성하겠다는 신도시는 쏟아져 나오는데 2기 신도시의 자족용지들은 아직 팔리지 않아 잡풀만 우거진 상황이었다. 계속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으로 서로의 도시에서 기업을 빼 와 돌려막지 않고는 그 넓은 땅을 다 채울 수 없는 지경이었다. (157)
결국 도시의 경쟁력은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지에 달렸다. 내가 살게 될 집, 세를 놓게 될 집 근처에 기업용지가 마련돼 있다고 해서 그곳에 조만간 기업이 입주할 것이라는 환상은 갖지 말자. 게임처럼 지도에 색칠을 해뒀다고 해서 저절로 공장이 생기거나 빌딩이 올라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163)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돈이 많이 남을 개발사업이라도 정책을 극복할 수 없다. 모든 장점을 상쇄하거나 모든 단점을 덮어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이 부동산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4)
문제는 어느 쪽으로든 일관서잉 없고 정치 지형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165)
교통과 지형 등 입지적 잠재력이 큰 지역에선 주변의 개발이 지역의 가치를 높였고, 비슷한 여건이지만 일대에 뚜렷한 콘텐츠가 없는 지역은 소규모 상권으로 남았다. 반대로 접근성과 수급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려고 했던 상권은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결국 주변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느냐가 상권의 생명이고, 정책은 이것을 결정한다. (195)
6장_다시 태어나는 입지, 도시가 만들어지는 배경
그런데 지형적인 조건을 차지하고 이들 지역이 택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길 건너편에 이름을 적을 수 없는 보안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229)
다핵도시는 그 핵이 중심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서울로의 길이 열리면 서울이 블랙홀처럼 다 빨아들이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도시든 간에 거의 서울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자족도시 개념은 그 도시 안에서 이루어지게끔, 고의는 아니지만 단절이 우선입니다.
동탄신도시의 출발은 삼성전자에요. 과거엔 공식적으로는 말씀을 못 드렸지만 우리 머릿속에 그게 있었죠. 처음 계획 당시도 도면을 보면 아시겠지만 삼성전자 주변을 블록아웃시켰거든요. 그게 지금의 삼성전자고, 돌이켜서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그 삼성전자가 모태화되지 않았다면 동탄신도시는 저렇게 활성화되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36-237)
기업을 유치하는 가장 좋은 전략은 사실 토지 가격입니다. 땅값을 낮춰주는 거죠. 도심융합특구, 기회발전특구, 투자촉진지구 등 기획재정부나 국토교통부에서 하는 여러 가지 균형발전사업엔 원가를 낮추거나 기업의 부담을 낮추기 위한 조세 감면 혜택이 있습니다. 그런데 2기 신도시는 수도권 택지다 보니 그런 조건이 없었어요. 그래서 기업을 유치하기가 쉽지 않죠.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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