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고전문학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리노타호 2026. 7. 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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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이런 생각만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19)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 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1)

 

저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했지만 '우정'이라는 것을 한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었고(호리키처럼 놀 때만 어울리는 친구는 별도로 하고) 모든 교제가 그저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어서 그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열심히 익살을 연기하느라 오히려 기진맥진하곤 했습니다. 조금 아는 사람의 얼굴이나 그 비슷한 얼굴이라도 길거리에서 보게 되면 움찔하면서 일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불쾌한 전율이 엄습해서, 남들한테 호감을 살 줄은 알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하긴 저는 이 세상 인간들에게 과연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 대단히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소위 '친구'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고 게다가 저한테는 남의 집을 '방문'하는 능력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남의 집 대문은 저한테는 저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 이상으로 으스스했고 그 문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용같은 비린내 나는 짐승이 꿈틀거리는 기척을,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느꼈던 것입니다.

아무하고도 교제가 없다. 아무 데도 찾아갈 곳이 없다.

호리키. (81)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을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스럽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6)

 

(직소)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 그분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을 테다. 그 사람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내 거야. 그 사람을 남의 손에 넘기느니, 차라리 그전에 내가 죽여버리겠어. 아버지를 버리고, 어머니를 버리고, 태어난 고향을 버리고, 나는 오늘까지 그분만을 쫓아다녔어. 나는 천국을 믿지 않아. 하느님도 믿지 않아. 그분의 부활도 믿지 않아. 그 사람이 무슨 이스라엘의 왕이겠어. 바보 같은 제자들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 (143-144)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말하는 것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터리야. 나는 하나도 믿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은 믿어. 그렇게 아름다운 분은 이 세상에 없어. 나는 그분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어. 그뿐이라고. 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아. 그 사람을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천국이 가까워지면 멋들어지게 총리나 부총리가 되어 보려는 그런 치사한 마음도 없어. 다만 그 사람을 떠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단지 그분 곁에 있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 (144)

 

저는 어쩐지 그분이 마음 속에 품고 계신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분은 쓸쓸하신 거야. 지금 극도로 마음이 약해져서 무지하고 사리에 어둡고 고루한 제자들한테라도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되신 게 틀림없어. 가엾게도. 저분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신 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저는 갑자기 오열이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그분을 끌어안고 함께 울고 싶어졌습니다. 오오, 불쌍한 분. 당신을 처벌받게 할 수는 없어. 당신은 늘 다정했어. 당신은 언제나 옳았어. 당신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편이었어.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어. 당신은 하느님의 진정한 자식입니다. 저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154)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얼굴을 숙이고 신음하듯 흐느끼듯 괴로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뒤로 자빠질 만큼 놀라서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분 뒤에 모여들어 제각기 "주여, 저를 말씀하십니까." "주여, 그것은 제 얘깁니까."라고 소리소리 질렀지요. 그러자 그분은 죽은 사람처럼 힘없이 고개를 저으시더니 "내가 지금 그자에게 한 덩어리의 빵을 주리니. 그자는 무척 불행한 사나이니라. 정말이지 그자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으리라."라고 의외의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시고, 한 덩어리의 빵을 들어 팔을 쭉 뻗더니 정확하게 제 입에 갖다 댔습니다. 저도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창피하다기보다는 미웠습니다. 그분의 새삼스러운 그 심술궂음이 미웠습니다. 그렇게 모든 제자들 앞에서 공공연히 저에게 창피를 주는 것이 지금까지 그분의 관례였던 것입니다. 저와 그녀석 사이에는 불과 물처럼 영원히 융합할 수 없는 숙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녀석은 개나 고양이한테 던져 주듯 한 덩어리의 빵을 내 입에 쑤셔 넣고는, 그런 게 녀석의 분풀이였는지, 하, 바보 같은 녀석, 저에게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 저는 곧장 식당에서 달려 나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길을 달리고 또 달려 방금 여기에 도착한 겁니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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